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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나 많은 시간이 지났다. 환청과 환각에 시달리면서 하루하루를 고통스럽게 보내던 중 트리니티가 내가 있던 병동을 찾아왔다. 트리니티가 처음 내가 있던 병실을 보았을 때 못 볼 꼴을 보았다는 표정을 지어냈다. 병실의 벽은 내가 손톱으로 박박 긁어가며 예전부터 계속 해오던 연구의 공식이 마치 낙서 마냥 적혀있었고, 침대의 시트는 전부 찢어져 책을 대신하여 피로 글이 적혀있었다. 그녀는 곧 표정을 바꾼 채 내게 다가왔다.
“외출 허가를 받았어요. 가야할 곳이 있으니 이 가방 안에 있는 옷으로 갈아입고 나와요.”
나는 가방을 열어보았다. 그녀가 무언가 큰 일을 할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했지만 가방 안에는 면 바지 하나와 티셔츠 하나 뿐이었다. 나가기는 싫었지만 그녀가 중요한 것처럼 말을 했으니 무슨 일인지는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옷을 갈아입고 병실을 나섰다. 그녀는 나를 이끌고 어디를 가나 했더니 상업구 구석진 곳의 술집으로 끌고 갔다.
“환자를 데리고 술집을? 자네 정신은 있는건가?”
“당신보다야 나을거라고 생각해요. 입 다물고 그냥 앉아요.”
그녀는 나를 억지로 자리에 앉히고 술을 가져왔다.
“아이스 브랜디에요. 예전부터 다시 한번 마실 수 있다면 하면서 노래를 불렀잖아요.”
“대체 무슨 생각인가?”
“일단 술을 한잔 걸치면서 마음을 트고 대화를 하자는 생각이에요. 잔말 말고 한잔 들이켜요.”
술을 마실 생각은 없었지만 시원하고 톡 쏘는 아이스 브랜디를 마시고 나니 한 잔 더 마시고 싶어졌다. 두잔 세잔, 잔이 계속 쌓여만 갔다. 취기가 올라오려던 참에 트리니티는 술병을 옆으로 치우고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더니 가방에 넣으려다 다시 탁상 위로 올려놓았다. 탁상 위에 올려진 것은 열쇠였다. 무엇을 위한 열쇠인지는 모르지만 그녀는 그것을 내게 주었다.
“이 열쇠는 제가 당신에게 드릴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에요. 림보. 센티언츠를 태양계에서 몰아내는 데에 성공했어요. 얼마 뒤에 터미너스에 연회가 있을 예정이에요. 우리는 그 때 모든 것을 바로 잡을 거에요.”
“나하곤 상관 없는 일일세.”
“가져가요. 이게 제가 할 수 있는 전부에요.”
“대체 무얼 위한 열쇠인지 말해줘야 하지 않겠는가?”
“죄송하지만 그건 말할 수 없어요.”
“끝까지 불친절하군.”
“미안하다는 말 밖에 못 드리겠네요.”
“선물을 줄거라면 내 연구를 도와줄 만한 물건이 좋았겠군.”
그녀의 불친절함이었을까 아니면 열쇠에 대한 의문이었을까 나는 기분이 매우 불쾌해졌다. 그 탓에 취기도 싹 가셨다. 브랜디가 가득 찬 잔을 내려놓고 나는 열쇠를 집어 술집을 나섰다. 뒤를 돌아보았을 때는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