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ERRY CHRISTM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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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감은 피칠갑이었을 텐데, 하고 생각하며 느릿하게 뜬 눈을 꿈뻑인다. 제 앞에 환하게 선 워프레임은 리셋으로 들어오면서 깨끗이 씻겨 지기라도 한 건지 매끈했다. 가까운 거리. 품에 안기어 탈출했던 그날의 침묵을 들을 수 있을 정도는 아니지만, 꽤나 가깝게 다가온 거리 너머에 가만히 서있는 것이 그저 조용하다. 얼마를 더 지켜보았을 때야, 평소와는 다른 점을 알 수 있었다. 어찌 이리 느리게 알아챈 것인지. 수백 년의 긴 잠 동안 감각이 둔해진 것이 아닐까, 하고 고저 물 흐르듯이 생각했다. 워프레임의 몸 선을 따라 시선을 옮긴다. 헤드에서부터 목, 목에서 어깨, 그리고, 어깨에서부터 내밀어진 손의 끝까지. 손가락 끝과 아이의 사이로 리셋의 기계음이 좁다랗게 지나간다.
[오, 오퍼레이터, 가지고 오신걸 보세요-! 저 더-어 지직- 질처억 하게 묻은 이물질들- 유기물-을요! 설마 바닥에 굴리실 건 아니죠?]
별다르게 말이 없자, 침묵을 지키던 오디스가 활발하게 말을 하기 시작하고, 약간의 시간차를 두어 능청맞은 농을 하기도 했다. 아이는 그것이 그리 재밌지만은 않다고 생각하며 눈을 깜박였다. 서늘한 우주의 온도가 볼 살에 맞닿고, 환한 별빛을 등진 그림자에 몸이 파묻혀져 나른하였다.
워프레임의 손안에 뉘인 무언가를 바라본다. 꿈에서 본 것과는 다르게 몇 배는 더 커다란 물체. 꼭 푹 퍼진 조랭이 떡이나 오뚝이처럼 생겼다. 색은 어디 흙 밭이라도 구른 것 마냥, 아니, 진짜로 흙이 덕지덕지 붙어있고, 흙이 그나마 덜 묻은 곳 사이로 보이는 색은 밀크초콜릿을 연하게 섞은 듯한 살구색이다. 보관함에 넣으면 될 것을 왜 나한테? 의문어린 생각을 해본다. 그러나 아이에게 내밀어진 손은 거둬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묵묵히 있을 뿐이었다. 물체와 워프레임 사이를 도로록 굴러다니던 댕그란 두 눈동자의 시선이 가만히 제 정착지를 찾아 안착했다. 바라보고, 또 바라본다. 워프레임을 통해 본 꿈속에서의 물체들 중 하나인 것 같은 익숙함이 들었다. 아이는 천천히 손을 들었다. 회복되어가는 중이라 해도 팔은 움직일 수 있었다는 점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함께 들리었다. 툭, 가져다 댄 손가락에 흙이 묻어 얼룩이 진다. 몇 손가락을 더 얹어 슥슥 흙들을 밀어낸다. 바닥에 떨어진 흙덩이들에 오디스의 경악어린 재잘거림이 빽빽 들려온다. 그래도 언제나처럼 치워줄 것을 알기에, 자그마한 고마움을 가지며 계속 물체의 겉을 문지른다. 손가락들이 흙투성이. 마르기 전의 축축한 빗물냄새와, 누릿한 맹수의 냄새가 섞여 고릿했다. 코끝이 찡그려지고, 동공이 조금 흔들린다. 그러한 냄새에도 불구하고, 겉으로 보이는 미묘한 떨림과 콩콩 뛰는 두근거림이 온기를 타고 전해져오니, 코를 휘젓던 냄새가 심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이는, 표정을 찡그리던 것도, 냄새가 풍겨오던 것도 잠시 잊어버렸다. 멈춘 손가락은 전해진 온기를 품고 따스해져 콩콩 뛰는 고동에 동동 귓가에 울리는 큰 고동으로 화답했다. 손가락을 뗀다. 그와 동시에 멈춰있던 워프레임이 조심스러운 소릴 내며 팔을 접어 알을 제 쪽으로 가져간다. 소매틱 링크로부터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바라본다. 걸어가는 묵직한 발소리, 무기들의 잘그락거림. 문이 열리는 기계소리는 펄럭이는 샨다나에 묻혀 잘 들리지 않고, 닫히는 문틈 사이로 보인 작은 알덩이는 손가락에 남은 온기가 제 것이라 소근대었다. 화상이라도 입은 듯 욱신거리는 손가락을 내려놓는다. 언제 소독됐는지 냄새는 더 나지 않았다. 편하게 등을 기대었다. 손끝이 괜히 작게 울리는 듯 했지만 아이는 나름 기분이 좋았다. 눈사람이랑 모양이 닮긴 한 것 같아…. 좀체 웃을 일 없던 입가에 얕은 볼우물이 파였다. 아이는 앞을 바라보다 눈을 감는다. 지나가는 별빛이 소매틱 링크 옆을 삐죽이 기웃거렸다. 아이의 도톰한 입술 언덕에, 올록볼록 튀어나온 손가락 마디에, 새치름히 내려앉은 속눈썹에 아롱아롱 매달린다.
[오퍼레이터-, 좋은 꿈꾸세요.]
나즈막히 지직이는 오디스의 말이 들리었다.